보통 만담이라고 그러면 일본영화에 자주 나왔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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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런 것을 떠올리게 되지 않습니까?
이것은 라쿠고(らくご, 落語) 라는 1인 만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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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동시에 한명 이상의 사람이 무대에 올라와 스탠딩 개그(아쉽지만 편한대로 표현을 했습니다)를 하는데, 이것은 만자이라는 2인 이상이 주고 받는 만담입니다. 사진은 모두 일본 드라마 [타이거 앤드 드래곤] 에서 캡쳐.

둘다 우리말로 옮기면 '만담' 이 되겠지만 사실은 꽤나 다릅니다.


라쿠고 (らくご, 落語)


라쿠고라는 것은 대화를 주로 하면서 한사람이 재미있게 공연하는 것으로, 마지막에 익살을 부리면서 웃긴다. 16세기말 전국 대명의 측근에는 '어가중'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역할은 '말하는' 상대를 하는 것이었다. 17세기말 원록경에 등장한 것이 오랑병위, 록야무좌위문, 광택언팔의 3명이었는데 인기를 끌었다. 그 중 오랑병위는 현재의 라쿠고의 원형을 포함하여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에도 시대 무좌위문이 데모를 벌여 후계자가 나오지 않았고, 단절되고 말았다. 다시 활기를 띠게 된 것은 100년 후의 일로, 서민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린 쇄락본과 황표지, 광가 등 재미있는 문학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인기가 늘어나면서 흥행하게 되었는데 1840년에는 상설극단이 생겼고, 급속도로 증가했다. 천보 개혁으로 급감하였으나 다시 부활하여 막부 말기에는 392개 정도로 늘어났다. '라쿠고'라는 문자가 사용된 것은 천명 무렵이었는데 명치20년까지 '라쿠고'라고 읽지는 않고, '오토시바나시'라고 읽었다.

명치시기가 되면 라쿠고계에서 대활약한 것이 삼유정원조이다. 이때 강호 라쿠고가 완성되었고, 그의 속기본이 언문일치체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또 같은 시기에는 유정연기를 시작한 명인이 속출하였고, 넌센스한 고전을 현대적인 내용으로 대체하여 해학적으로 변화시켜 근대 라쿠고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후 대정에서 소화에 걸쳐 명인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2차 대전 중에는 시국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여 금지한 것을 자주적으로 만들었는데 전후 인기는 다시 부활하였다. 특히 TV와 라디오에 전국적으로 방송되어 라쿠고는 전성기를 맞았다. 현재도 인기는 떨어지지 않고, 라쿠고의 팬 역시 줄어들지 않고 있다.

에도 시대에는 어디든지 극단이 있을 만큼 일이 끝나면 달려가 듣는 것이 허다했다. 서민에게는 유일한 오락이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도 서민의 생활에 공감을 주는 인물들로 생활의 활력소를 주곤 했다.

전후를 경계로 라쿠고도 어려움을 겪었다. 고전을 현대물로 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고,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한다는 것 자체도 어려웠고, 가부키처럼 의상을 갖추는 것도 매우 힘들었다. 라쿠고의 경우 명성은 계속되어도 연기를 하는 것은 한 사람이다. 때문에 고전을 확실하게 들여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라쿠고적인 발상에 기초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나오는 것도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http://www.jculture.co.kr/mil/japan_culture/entertain4.htm



만자이

요즘 만자이 콩쿠르에는 프로를 뺨치는 소년소녀들과 막 데뷔한 콤비에 아이돌 가수를 겸하는 집단이 출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통예능의 대부분이 고전화 되어가고 있는데 유일하게 젊은이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 바로 만자이다.

만자이의 역사는 매우 길다. 그 근원은 중세의 '만력'에서 헤이안 시대 말기 '천추만력'까지로 근 800년의 역사를 과시한다. '천추만력'은 정월을 축하하는 말로 궁중에서도 사용될 만큼 유서가 깊다. 실정시대에는 궁중과 절, 신사, 귀족과 무가 집안만이 아니라 일반 가정에서도 가정의 번영을 원하는 '말'을 하게 되었다. 문에 붙이는 스타일이 전국 각지에 퍼졌고, 그 지방의 이름을 붙여 '삼하만력', '회진만력', '미장만력'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무렵까지는 정월에 돌아다니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는데 전후에는 인기가 떨어져 최근에는 거의 전멸 상태이다.

곡조하나로 미장만력은 화려하고, 월전만력은 경쾌하고, 이서만력은 민요풍으로 여러 가지 가사와 무용 등이 있다. 거의 공통되는 것이 태부와 재장의 콤비 플레이. 태부는 대체로 사무라이 모자에 사무라이의 대표적인 복장인 삼베 의복을 입었다. 재장의 복장은 일본식 바지에 검은 두건을 쓰고, 큰 띠를 두른다. '학은 천년을 살고, 거북은 만년을 산다'라고 태부가 어깨를 움직이며 말을 떼면 재장이 북을 두드린다. 축사 전반에서 후반부에는 익살스럽게 문답을 한다. 이것이 만자이의 직접적인 근원이다.

현재와 같은 만자이의 원조는 옥자가원진이라는 사람이다. 본업은 계란 장사였는데 미성으로 평판이 났다. 이것에서 그치지 않고, 프로로 데뷔하여 활약하였는데 삼하만력의 '태부· 재장'의 스타일을 만들었고, 나고야만력이라고 명명하였다. 명치 말 오사카, 천만천신의 작은 방이 그의 데뷔 무대였다. 각각 자신 있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손님들이 좋아하는 것을 부르는 등 점점 다양한 양상을 띠었다. 민요나 가요 등 노래를 주로 하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며, 촌극 등을 하기도 했다. 대정말기에는 신흥 연예에 중점을 둔 길본흥업이 조직화되었다. '만력'의 이름을 만재로 한 것도 길본흥업의 선전부였다. 1930년 만화나 만담 등이라고 고쳤다.

소화시기에 이르면 만재는 오사카의 으뜸으로 부각되어 현재에도 '동경은 라쿠고가 중심'이고 '오사카는 만자이가 중심'이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점점 남녀 콤비가 등장하게 되자 여성은 옷단 모양을 고친 복장을 하게 되었고, 대화 내용도 변하였다. 만세(万歲)가 만재(漫才)로 변한 그 해에 콤비를 결성하였고, 소위 '잡담 만자이'가 확립하게 되었으며, 현재와 같은 만자이 붐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들은 화복을 입고 만자이를 하는데서 벗어나 처음으로 양복을 입었고, 만자이 영화를 최초로 촬영하였다. 초기에는 노래를 불렀는데 1934년 유명한 '조경전'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라디어로 신궁구장에서 실황중계를 하였고, 야구를 보지 않는 사람도 조경전의 팬이 되는 시대였다. 특히 엔타쯔·아챠코의 조경전은 소화9년 가을에 행해진 최초의 기석중계로 방송된 만자이로 전해진다.

전후를 경계로 만자이는 쇠퇴하였으나 소화30년대에 다시 부활하였다. 또 방송을 시작하면서 붐이 일어났다. 만자이 붐은 쇠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그것은 젊은이들이 가볍게 웃고 즐길 수 있는 것을 원하며, 새로운 돌출 천재를 기대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지속되리라 본다.

http://www.jculture.co.kr/mil/japan_culture/entertain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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